칠곡·울산 아동학대·살인 사건을 두고 우리 공동체는 유례없이 공분했다. 일상적인 무관
심, 방치, 외면 속에서 연민과 관심, 이타심을 확인할 수 있어 참으로 다행스러웠다.
그러나 1심 판결에 대한 저주를 들으면서 안도감은 불안으로 바뀌었다. 그들의 공분은 아
이의 고통에 대한 공감에서 비롯된 것일까, 아니면 가해자에 대한 증오에서 비롯된 것일
까. 그게 무슨 차이가 있느냐고 반문할지 모른다. 하지만 공감의 발로였다면, 관심은 나와
이웃 그리고 사회로 확장돼 더 나은 제도와 합의를 만들어낼 것이다. 반면 증오와 보복감
정이라면, 아이의 죽음은 단지 충격적인 일회성 사건으로 끝난다. 아동학대는 그대로 온존
할 것이기 때문이다.
그날 법정 밖에선 ‘사형’을 외치는 피켓 시위가 벌어졌다. 시민들은 고통스러워하면서 울
부짖기도 했다. 매체들의 논조는 한결같이 형량(10년·15년 징역)을 비웃으며 법관을 비난
하는 것이었다. 거기엔 불행하게 살다가 불행하게 떠난 아이가 없었다. 아이가 꿈꾸는 세
상은 없었고, 사회적 복수의 저주뿐이었다. 우리 공동체의 반성도 없었고, 더 나은 세상을
향한 다짐도 없었다. 매체들이 내놓는 대안이란 것도 처벌 강화 등 증오심의 연장이었다.
그런다고 아동학대가 사라질까, 제가 아이들에게 가하던 강요와 겁박, 폭력은 중단될까?
우리 사회는 아이들을 부모에 딸린 부속품 정도로 여긴다. 배우자에 대한 폭력도 가정사라
며 면책되는데, 아동학대는 논외다. 아이들을 학대하고도 가정교육으로 둘러대면 그것으
로 끝이다. 오히려 간여하면 사생활 참견이고 월권이다. 나아가 아이는 부모 욕망을 실현
하기 위한 도구쯤으로 간주된다. 기대에 따르도록 강제가 작용하고, 기대에 못 미치면 사
적 폭력이 행사된다. 가난하거나 해체된 가정의 아이들은 헐벗고 굶주린 채 방임된다.
국가는 한술 더 떠 아이들을 ‘자원’으로 간주한다. 건축자재나 다를 게 없다. 그런 자재를
가공하는 데 필요한 노동력이라는 자원일 뿐이다. 교육제도는 이런 자원을 가공하는 과정
이다. 그 과정이 얼마나 폭력적이었으면, 중고교생들은 거리에서 ‘밥 좀 먹자’, ‘잠 좀 자
자’ 시위를 벌였다. 대학생들은 ‘과연 우리는 안녕한가’고 스스로 반문했다. 그런 우리의
현실을 상징하는 게 학생인권조례를 둘러싼 논란이었다. 가공 공정의 자원이 어떻게 제멋
대로 행동할 수 있는가! 이 정부는 물론 우리 사회의 이른바 어른들은 그렇게 주장했다. 학
생은 두발·복장·소지품·이성교제, 모든 걸 통제당하고, 길들여져야 할 존재였다. 청소년이
자원이라면, 아이들은 무엇일까? 어른들 입맛대로 주물러 빚을 수 있는 흙반죽?
착잡한 것은 학생인권조례를 왜곡하고 폐기하는 데 혈안이었던 매체들이 이번 사회적 복
수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 것이었다. 그런 이들이 극형을 주장했으니, 의심이 들지 않을
수 없었다. 가해자에 대한 응징, 곧 사회적 복수를 앞세워 저들의 반인권 행태를 은폐하려
한 것은 아닐까. 사실 복수란 정의롭지 않다. 또 다른 범죄일 뿐이다.
죄에 대한 응보는 사법부에 맡기는 게 옳다. 엄벌이 무조건 좋은 것도 아니다. 교육은 변화
와 개선의 가능성에 대한 믿음 위에서 이뤄지는 것이고, 교도행정은 개선과 교화에 있지
처벌과 격리에만 있는 건 아니다. 아이들이 이 세상에 나올 때 어른들처럼 증오와 복수심
을 갖고 있지 않다. 그런 감정을 심어준 것은 어른이고, 우리 사회다. 어른들은 근엄하게
‘죄는 밉지만, 사람은 미워해선 안 된다’고 가르치지만, 아이들은 사실 그런 걸 이미 내면
화하고 있다.
새누리당이 아동학대·가정해체 방지특별위원회를 구성하자고 제안했다. 이미 국민안전본
부를 설치한 당이다. 기구가 없어서 아동학대나 세 모녀 자살 사건 등이 잇따른 건 아니다.
문제는 무너진 인간에 대한 존중이다. 모든 생명을 제 몸처럼 소중히 여기는 자세를 되살
려야 한다. 학생이건 아동이건 인권 보호의 기본 정신이다. 근본은 뭉개면서, 일만 나면 증
오와 저주의 언사로 호들갑 떨지 말자. 솔직히 대책보다 참회가 먼저여야 한다. 그게 하늘
의 아이의 생각 아닐까.
< 출 처 : 한겨레 곽병찬 >